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사는이야기 2020. 7. 28. 14:57
좀처럼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지금은 코로나 이후가 아니라 코로나와 함께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지난 몇 달 동안 코로나와 함께 살면서 잊고 있었던 아니 미처 깨닫지 못했던 진실을 몇 가지 깨달았다.
지난 3월과 4월 등교 개학이 미루어졌을 때였다. 날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기도 귀찮고 감염 위험도 걱정스러워 교사 몇몇이 모여 밥을 해 먹기로 하였다. 야영할 때 쓰던 장비를 가져다 두고 집에서 밑반찬과 밥을 싸오고 삼겹살, 닭볶음탕, 매운탕을 만들어 먹었다.
처음 며칠은 재미있었지만 금세 지치고 말았다. 준비도 번거롭지만 설거지를 비롯한 뒷정리도 힘들었다. 라면이 좋아지다가 위험해도 식당을 찾는 것이 낫겠다고 결론을 낼 무렵 다행스럽게 아이들이 학교에 나왔다. 급식소에서 해주는 밥을 먹으며 급식 노동자가 하는 일이 수업보다 중요함을 깨달았다.
현대인은 다른 사람의 노동에 기대어 산다. 안타깝게도 생존에 꼭 필요한 노동 가운데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노동이 많다. 급식, 청소, 아파트 경비와 같은 노동이 자동차나 펀드를 판매하는 노동보다 가치가 떨어진다고 느껴지는 것은 노동에 매겨지는 돈의 많고 적음 때문이리라.
옛날에 어머님과 함께 연속극을 보고 있었다. 요즘도 많이 나오는 장면이다. 새파랗게 어린 부잣집 딸이 식모로 부르던 이에게 말한다.
"아줌마! 물"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을 때 어머님께서 하신 말씀 한마디가 아직도 생생하다.
"물로 지손으로 못 쳐묵나!"
가난을 무능이나 게으름으로 바라보는 이가 많다. 과연 그런가? 모든 노동자가 필요를 채울 만큼 돈을 가지게 되면 세상에 유토피아가 펼쳐질까? 이런 물음에 "그것은 아니지!"라고 답한 이가 있다. '이반 일리치' 이름도 멋진 그는 막연하게 교사를 꿈꾸던 젊은 시절 <교육신화>로 내게 충격을 주었던 사상가다. 훗날 <학교 없는 사회>,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를 읽었고 오늘은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를 읽고 글을 남긴다.
'현대화된 가난'은 과도한 시장 의존이 어느 한계점을 지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가난은 산업 생산성이 가져다준 풍요에 기대어 살면서 삶의 능력이 잘려나간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풍요 속의 절망이다. 이 가난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창조적으로 살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데 필요한 자유와 능력을 빼앗긴다. 그리고 플러그처럼 시장에 꽂혀 평생을 생존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게 된다.
요즘 우리가 일터에서 하는 노동은 대부분 돈을 벌어서 상품을 사기 위함이다. 자동차를 사고 유지하기 위해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만 한다. 집을 사기 위해서 영혼까지 끌어모은다는 '영끌'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아파트를 사기 위한 수 억을 벌기 위해선 평생을 '모던 타임'에 나오는 찰리 채플린처럼 영혼 없이 나사를 돌려야 한다. 요즘 젊은이들 가장 커다란 꿈이 취업인데 정작 취업한 이들 상당수는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꿈이다. 초등학생이 건물주를 꿈꾸는 이상한 세상이다.
지금까지 만족스러운 행위를 표현할 때 쓰던 말은 대부분이 동사였지만, 이제는 오로지 수동적 소비를 하도록 고안된 상품을 가리키는 명사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예컨대 전에는 무언가를 '배운다'라고 말했지만, 지금은 '학점 취득'이라 말한다.
요즘 넘쳐나는 온갖 '케어'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저자는 이른바 '전문가'로 부르는 사람들이 끼치는 해악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코로나 유행에서 의료용 마스크가 아니면 소용이 없다던 전문가들이 슬그머니 천 마스크도 괜찮다고 말을 바꾸었다. 처음에 나는 침방울만 막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받았다. 하지만 이제 아무도 의료용 마스크를 고집하지 않는다.
급식소에서 주걱으로 바이러스 전파가 일어날 수 있다며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고 만져야 한다는 지침은 여전하다. 끼니 때마다 버려지는 엄청난 양의 비닐장갑을 보고 있자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확진자가 전혀 나오지 않은 시골 학교도 등교해서 하교할 때까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다. 혼자서 운전을 하거나 공원을 산책하면서도 마스크를 벗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진다.
수많은 사람들이 현대의 대성당인 병원과 학교로, 복지시설로 거대한 무리를 지어 이동한다. 가족의 건강을 보살피던 가정은 위생적인 아파트로 바뀌었다. 이곳에서는 아이가 태어날 수도 없고, 아플 수도 없으며, 고귀한 죽음을 맞을 수도 없다. 삶의 고비마다 도움을 주던 이웃도, 멀리서 왕진을 와주던 의사도 오래전 사라진 인종이다. 무언가를 배우는 데 적합했던 일터는 옷깃에 '신분'을 증명하는 금배지를 단 직원만 접근할 수 있는 복도로 이루어진 희미한 미로가 되어버렸다. 이제 서비스 배달 통로로 설계된 이 세계는 복지 수령자로 변한 시민들의 유토피아가 되었다.
집에서 아이를 넷이나 낳고 기르시고 유치원은 커녕 학습지도 시키지 않으신 우리 어머님은 요즘 기준으로 생각하면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살아갈 집을 제 손으로 짓지 못하는 유일한 동물이란 말도 있다.
이 책을 1978년에 썼는데 우리나라는 가방을 들고 왕진오는 의사는 원래부터 없었다. 물론 재벌가에는 지금도 있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를 말하고 있다. 집을 사기 위해 영끌하는 세상에 넌더리가 난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