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릉계곡에서 시비를 읽다가
사는이야기 2026. 8. 23. 11:19무릉계곡에 갔을 때 보았지만 별다른 관심은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찍어 온 사진을 다시 보다가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어울리지 않게 한글로 적은 ‘최인희 시비’가 먼저 눈에 띈다. 한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을 염두에 두고 덧붙인 모양이다.

낙조(落照)
- 글 최인희
소복이 산마루에는 햇빛만 솟아 오른 듯이
솔들의 푸른빛이 잠자고 있다.
골을 따라 산길로 더듬어 오르면
나와 더불어 벗 할 친구도 없고
묵중이 서서 세월 지키는 느티나무랑
운무도 서렸다 녹아진 바위의 아래위로
은은히 흔들며
새어오는 범종 소리
白石이 씻겨가는 시낼랑 뒤로 흘러 보내고
고개 넘어 낡은 단청
山門은 트였는데
천년 묵은 기왓장도
푸르른 채 어둡나니
최인희 시인은 생각보다 옛날 분이다. 낙조도 1950년 작품이니 무려 76년이 지났다. 이 시비는 언제 세워졌을까? 이제 사진 속 시비의 역사를 연구할 때가 되었다. 시비를 세울 당시에는 한글보다 한자를 써야 멋스럽다고 생각하는 시절이었을 터이다. 나도 한때는 중간중간에 한자를 섞어 쓰는 걸 멋으로 여겼던 사람이라 한자로 쓴 ‘백석(白石)’과 ‘산문(山門)’이 낯설지 않다. 굳이 한자로 쓴 까닭도 짐작이 간다.

1948년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지만 오늘날처럼 완전한 한글전용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긴 세월이 필요했다. 법에는 분명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고 했지만 대부분 한글 없이 한자를 섞어 쓰는 혼용이 대세였다. 한글전용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역할도 컸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10월 25일 국무총리와 관계 장관에게 ‘한글전용 촉진 7개 사항’을 지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행정·입법·사법 문서의 한글전용
- 1970년 1월 1일부터 행정·입법·사법의 모든 문서와 민원서류를 한글로 작성
- 한자가 들어간 서류는 접수하지 않도록 함
2. 한글전용연구위원회 설치
- 문교부에 연구위원회를 설치하여 알기 쉬운 한글 표기와 보급 방법을 연구
3. 한글타자기 개발·보급
- 한글타자기의 개발을 서두르고 일선 행정기관까지 보급
4. 언론·출판계의 한글전용 권장
- 언론과 출판 분야에서도 한글전용을 적극적으로 권장
5.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 개정
- 1948년 법률에 있던 한자 병용의 단서를 삭제하고 한글전용을 시행
6. 학교 교과서에서 한자 삭제
- 각급 학교 교과서에서 한자를 없애도록 함
7. 고전의 한글 번역 촉진
- 한자로 된 고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서두르도록 함.
정권의 강력한 추진에도 불구하고 민간 영역에서는 여전히 국한문 혼용이 많았다. 1988년 한겨레신문이 창간될 무렵에도 대부분의 신문은 한자를 상당히 많이 섞어 썼고 세로로 기사를 배치했다. 한자를 모르면 신문을 읽는 일이 지금보다 훨씬 불편했다. 조선일보가 가로쓰기로 전환한 것은 그보다 11년 뒤인 1999년이었다. 지금도 제호를 한자로 쓰는 조선일보를 생각하면, 우리가 지금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한글 가로쓰기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런 상황이 지금까지 이어졌다면 우리나라도 중국이나 일본처럼 디지털 환경에서 문자 입력 문제로 적지 않은 불편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한자를 섞어 쓴 수학책으로 공부하는 일은 상상조차 싫다. 그런데 한자를 몰라도 되는 세상이 된 지금은, 우리말 사이에 끼어드는 영어 때문에 한/영 자판을 오가는 일이 귀찮다.
그러고 보니 처음 무릉계곡에서 이 시비를 보았을 때는 이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한자로 적힌 시비 하나가 있구나 하고 지나쳤을 뿐이다. 사진 한 장을 다시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한글과 한자, 세로쓰기와 가로쓰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일이 없었을 것이다. 매일 보고 쓰는 문자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오랜 시간에 걸쳐 변해 온 풍경인지 모르겠다.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정리하다 보면 그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이야기를 뒤늦게 발견하는 즐거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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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걸어온 길 > 한글회복 및 정착기 >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 제정 1948년
ㆍ홈 > 한글회복 및 정착기 >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 제정(1948년) 갑오경장 때 시도된 공문서 한글 전용이 다시 시도된 것이다. 이 법률은 “대한민국의 공용 문서는 한글로 쓴다. 다만, 얼마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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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덧댄 시비를 보고 든 생각
무릉계곡에 갈 때마다 보았지만 별다른 관심은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찍어 온 사진을 다시 보다가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어울리지 않게 한글로 적은 ‘최인희 시비’가 먼저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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