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크크’와 앞물결의 자리
사는이야기 2026. 9. 23. 11:35오래 살면 모든 걸 알게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모르는 것이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빠르게 늘어난다. 새로 만들어지는 말이 특히 그렇다. 신조어를 따라잡기에는 숨이 차서 웬만하면 신경 끄고 사는 편이다. 하지만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귀에 들어오는 말들이 있다. 그런 말은 가끔 찾아본다.
먼저 ‘영크크’란 말을 찾아보았다.
‘영크크’ 또는 ‘영ㅋㅋ’는 보이그룹 CORTIS의 노래 〈YOUNG CREATOR CREW〉의 제목을 줄여 부르면서 퍼진 말이라고 한다. 노래 가사에 나오는 “요를레이히 말고 영크크”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나무위키
그런데 사실 나는 ‘영크크’보다 ‘늙크크’를 먼저 보았다.
어떤 기사에서 ‘늙크크’란 말을 보고 처음에는 ‘크크’가 웃음을 뜻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크리에이터 크루(Creator Crew)’에서 온 말이라니 뜻밖이었다. 우리말로 옮기면 대략 ‘창작자 모임’쯤 되겠다.
그렇다면 ‘늙크크’는 ‘늙은 창작자 모임’인가. ㅋㅋ. 꼰대나 틀딱처럼 아직은 늙음을 조롱하는 말은 아닌 모양이라 다행이다.
‘노화’는 오랫동안 피할 수 없다면 최대한 늦추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아예 ‘나이 듦’ 자체가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젊은이만 그러는 것도 아니다. 제법 나이 든 사람조차 늙었다는 말을 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나 또한 명퇴를 고민할 나이가 되었지만 ‘늙었음’을 쿨하게 인정하지 못할 때가 많다. 몸은 먼저 알고 있는데 마음은 한참 뒤에서 따라온다.
그래도 한 가지 섭리쯤은 안다.
長江後浪推前浪(장강후랑추전랑)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 새로운 세대가 앞선 세대를 밀어내는 것은 야박한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앞물결이 자꾸만 제자리에서 버티려고 할 때 생긴다.
요즘 ‘노욕’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구독을 끊었는데도 알고리즘을 비집고 들어와 계속 눈에 띈다. 정치판이든, 거대한 조직이든, 학문과 문화의 현장이든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제는 마이크를 내려놓아도 될 법한데 좀처럼 손에서 놓지 못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저마다 그럴듯하다. 경험이 필요하다고 하고,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고 하고,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한다.
물론 나이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물러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랜 경험과 지혜가 필요한 자리도 있고, 나이와 무관하게 여전히 자기 몫을 훌륭하게 해내는 사람도 많다. 문제는 나이가 아니라 자리를 대하는 태도일 것이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 내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어쩌면 자신감이라기보다 두려움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쓸모없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그래서 추한 것은 늙음 자체가 아니다.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의 몫까지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는 모습이 추한 것이다.
마른 잎이 떨어져야 그 자리에서 새순이 돋는다. 그것은 계절의 섭리이고 세대가 이어지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모든 늙은 잎이 서둘러 떨어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아직 햇빛을 받아 나무에 힘을 보태는 잎이라면 제 몫을 하면 된다.
다만 때가 되었음을 알면서도 자리를 놓지 못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진짜 어른의 품격은 말을 많이 하는 데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앞장서야 할 때와 뒤에서 밀어주어야 할 때를 구별하는 데서 나온다. 후배의 등을 두드려주고, 자신에게 향하던 조명이 다른 사람에게 옮겨가는 것을 기꺼이 바라볼 수 있는 마음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것은 남들에게만 할 이야기가 아니다.
나도 어느새 앞물결 쪽에 가까워지고 있다. 지금은 남의 ‘노욕’을 쉽게 알아보지만, 막상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라고 다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어쩌면 늙어가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공부는 새로운 말을 하나라도 더 배우는 일이 아니라, 언제 앞으로 나서고 언제 뒤로 물러서야 하는지를 배우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무대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반드시 끝까지 무대 위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박수가 남아 있을 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다음 사람에게 조명을 넘겨주는 것.
그것도 꽤 괜찮게 늙어가는 방법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