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이 좋다
사는이야기 2019. 10. 1. 14:34시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아이들은 재빠르게 시험지를 넘긴다. 작은 기침 소리와 코훌쩍이는 소리 그리고 글씨 쓰는 소리가 들린다. 때로는 시계 초침 소리까지 들린다. 시험 보는 학생에게는 빠르게, 감독하는 교사에게는 느리게 시간이 흐른다. 끝나는 종이 울리면 교실 안에 기쁨과 슬픔이, 환호와 탄식이 교차한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시험이 좋다. 학생 때는 학교가 빨리 끝나서 좋았다. 고등학교 시절엔 문제를 다 풀면 먼저 나가도 됐다. 친구와 누가 더 빨리 나가는가 겨루기도 했다. 먼저 나가서 복도에서 정답을 크게 시험 보는 친구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물론 장난스럽게 오답을 알려주기도 해서 낭패를 당하는 친구도 있었다. 지금은 상상조차 힘든 풍경이다. 교사가 된 다음엔 수업하지 않아서 좋다. 오후엔 운동하거나 푹 쉴 수도 있다.
요즘엔 시험을 좋아하는 학생이 많지 않다. 1학년 1학기부터 3학년 1학기까지. 5학기 내내 차곡차곡 쌓은 점수에 따라 대학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정기고사가 다가 아니다. 과목마다 시도 때도 없이 치르는 수행평가도 있다. 숨 돌릴 겨를이 없다. 자율활동, 동아리활동, 봉사활동과 진로활동까지 입시에 반영된다. 학생들이 안쓰럽다. 시험 시간에 너무 떨려서 글씨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학생도 있었다.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시험 문제가 있다. 아마도 1986년이었을 게다. 작문 시험이었다. 원고지가 그려진 커다란 8절 시험지에 두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춘향이에게 비판하는 내용으로 편지를 쓰는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아침에 학교 오면 겪은 일을 글감으로 일기를 쓰는 문제였다. 100점을 받았다. 시험이 끝나고 작문 선생님께서 모범 답안을 읽어주셨는데 내가 쓴 글이었다. 가난한 글솜씨를 가진 수학 선생이 여기저기에 글을 쓰는 자신감을 만들어준 훌륭한 문제다.
훗날 작문 선생님께서는 전교조 결성에 나섰다가 해직을 당하시기도 했다. 선생님은 세월을 많이 앞서 가신 분이다. 요즘도 이런 시험 문제를 내는 교사가 흔치 않다. 맡은 학생이 많다면 채점이 힘들 것이고 어쩌면 채점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생과 학부모도 많을 것이다. 같이 시험 문제를 만드는 교사끼리 의기투합도 쉽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객관식 시험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까닭이다.
감독하다가 지루할 때 가끔 여분 시험지를 풀어 본다. 보기 다섯 개 가운데 정답이 아닌 걸 지워 나가면 꼭 두 가지가 남는다. 객관식 문제엔 매력 있는 오답을 만드는 기술이 필요하다. 나쁘게 말하면 함정을 파는 것이다. 어쩌면 '수학능력시험'은 함정에 잘 빠지지 않는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이다.
지난해부터 나는 객관식 문제를 내지 않는다. 수학 과목은 정답이 정해져 있어 채점도 그리 어렵지 않고 무엇보다 같은 수학 교사끼리 뜻이 잘 맞아서 가능한 일이다. 올해는 정기고사에 객관식 문제가 없는 과목이 더 많아졌다. 학생 답안지를 기계가 아닌 손으로 하나하나 채점하면 학생을 더 잘 파악할 수 있어서 좋다. 장단점과 함께 글꼴까지 알게 된다. 풀이 과정에 따라 부분 점수도 줄 수 있어서 좋다. 시험은 역시 주관식이다. 다만 학생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대학 입시가 바뀔 분위기다. '고교학점제' 전면 시행(2022년)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고교학점제'는 고등학교도 대학처럼 학생 스스로 듣고 싶은 과목을 골라서 학점을 따는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학급과 학년 그리고 계열(문·이과) 구분을 없애고 나아가 다른 학교에서 학점을 딸 수도 있게 만들 예정이다.
학생들은 저마다 수준에 맞는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게 되어 잠자는 교실을 깨울 수 있다는 밝은 미래를 제시하고 있지만 기대보다 걱정이 앞선다. 이미 공동교육과정을 운영하는 학교에서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내신성적이 대학 입시에 반영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이 많다. 고등학교 모든 시험은 객관식을 없애고 절대평가로 바꿔야 한다. 대학 입시에서 고교 내신성적 반영도 없애야 한다. 교육 개혁은 교사에게 온전한 평가권을 주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아무튼 우리 교육이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