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을 읽는 즐거움
사는이야기 2020. 12. 31. 12:05아주 먼 옛날 1994년 제대하고 복학했을 때 마음 가는 데가 없어서 논어를 필사한 적이 있다. 지금과 달리 컴퓨터도 없었던 시절이라 헌책방에서 허름한 논어를 한 권 사서 두고 생각날 때마다 복사지에 옮겨 써서 자취방 벽에 붙여 놓았다. 벽면 한 가득 도배된 글귀를 본 친구와 후배들은 점집 분위기가 난다며 웃었다. 생각보다 쉽게 학교생활에 적응하면서 이내 시들해져서 끝까지 옮겨 쓰지는 못했다.
요즘 논어를 읽고 있다. 뚜렷한 까닭은 없다. 그저 어느 날 문득 갑자기 논어를 읽고 싶어졌다. 필사를 생각했다가 블로그를 하나 만들고 '논어 일기'를 적기로 했다. 세상이 좋아져서 인터넷에 논어 원문과 해설이 넘쳐 난다. 하지만 뭔가 아쉬움이 남는 자료가 대부분이다. 같이 근무하는 한문 선생님께 책 추천을 부탁드렸더니 ‘도올만화논어’를 추천하셨다. 도올 선생이 쓴 논어 해설을 바탕으로 만화가 보현이 그림을 그렸다. 모두 다섯 권으로 묶었는데 1권과 2권에 있는 ‘학이편’, ‘위정편’, ‘팔일편’을 읽고 이제 막 3권에 있는 ‘이인편’을 읽기 시작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추억이 생각나서 좋다. 나이가 들어서 일까 논어가 주는 즐거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25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어떤 글귀는 요즘 세태를 직접 보고 꾸짖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얼마 전에 읽은 팔일편 마지막인 26장을 옮겨 놓는다.
자왈 거상불관 위례불경 임상불애 오하이관지재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윗자리에 있으면서 너그럽지 아니하며, 예를 행함에 공경스럽지 아니하며, 상에 임함에 슬퍼하지 않는다면 내 그를 무엇으로 평하겠는가?“
읽자마자 바로 변창흠 장관이 떠올랐다. 그는 구의역에서 목숨을 잃은 청년 김용균을 두고 “걔가 조금만 신경 썼으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사람이 있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많지 않겠지만 함부로 이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것이다. 너그럽지 못하고 공경스럽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굳이 이런 자를 장관으로 내세우는 까닭이 궁금하다.
요즘 정치가 있어야할 자리를 사법 판결이 차지하는 일이 많다. 설상가상 이해하기 어려운 사법 판결도 많다. 검찰총장 징계를 둘러싼 사태를 보자. 세월호 관련 시국 선언을 한 교사들에게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며 벌금형을 선고한 대법 판결을 생각하면, 검찰총장은 징계를 받아 마땅하다.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전광훈에게 표현의 자유를 들어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까닭은 정권이 무능한 탓도 있다고 생각한다. 행정명령으로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만든 상황을 바로 잡는데 대법원 판결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을 보면서 했던 생각이다.
‘중대재해 기업처벌법’을 둘러싼 상황을 보아도 그렇다. 의지만 있다면 ‘공수처 관련법’처럼 처리할 수도 있는 문제다. 애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100인 이하냐 50인 이하냐를 따지고 있는 모양이 서글프다. 그러면서 입으로 진보를 외치는 모습은 꼴사납다. 민주당은 아직도 지지율이 떨어지는 까닭을 모른다. 사람들이 과반을 훌쩍 넘기는 의석을 몰아준 까닭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실패한 정권은 바꾸면 그만이지만 민주당이 아니면 국민의힘이라는 오답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슬프다.
어쨌든 정치하는 사람은 반드시 논어를 읽어야 한다.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2021년 새해를 논어를 읽으며 시작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