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1세기 앞이 0세기가 아닐까?
수학이야기 2023. 1. 14. 23:56오늘날 사람들은 0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 어쩌면 하찮게 여기고 있다. 하지만 수학에서 0이 하는 역할을 생각하면 0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수이다. 사실 인류가 0을 제대로 인식하고 수로 받아들일 때까지 상당한 세월이 필요했다. 자연수, 유리수, 무리수까지 인식한 유럽의 수학자들이 0을 받아들인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0은 역사 속에서 희미한 모습으로 나타났다가 수학자들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2023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몇 세기인가? 21세기다. 1900년대는 20세기로 부른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 뭔가 이상했을 것이다. 올해부터 만 나이만 쓰기로 했다고 하니 이제 0살이 있는 것이다. 얼핏 보면 굉장히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전에 우리 나이는 잉태되었을 때부터 센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멋지다. 옛날 사람들은 0을 몰랐다.
처음으로 예수가 태어난 해부터 서기 연도를 매기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0을 몰랐다. 그래서 5년은 0세기가 아니라 1세기로 120년은 2세기가 된 것이다. 기원전 2세기는 언제일까 헷갈린다. 1층 아래는 지하 1층이다. 숫자만 써 놓고 보면 $-2-1, 1,2$ 뭔가 허전하다. 실제로 우리나라 엘리베이터엔 0층이 없지만 인도엔 0층이 있다.
오늘날처럼 추상화된 수학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수학은 실제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양을 세는 하나, 둘, 셋이란 말을 1, 2, 3으로 추상화한 것은 엄청난 진보다. 하지만 0은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수가 아니다. 필요에 의해 발명되어야 하는 수이다.
오늘날 우리는 0을 두 가지 용도로 쓴다. 하나는 자릿수를 구분하는 빈자리를 나타내는 용도이고, 다른 하나는 양수와 음수를 가르는 기준으로 아무것도 없는 양을 나타내는 용도다. 엄밀하게 따지면 전자로 쓰는 0은 수가 아니라 읽는 법을 알려주는 구두점 기호일 뿐이다.(영어 이름 "zero"는 "암호: cipher"라는 뜻을 가진 아랍어 sifr에서 파생되었다.)
숫자에 자릿값을 매기는 진법 시스템은 메소포타미아, 마야, 인도와 같은 여러 문명에서 나타났다. 고대 바빌로니아인은 숫자를 자릿값이 매겨진 60진법으로 기록한 점토판을 남겼다. 발굴된 점토판을 분석하여 기원전 1700년 경에는 2103과 21 3을 명확하게 구별하여 적지 않고 문맥 속에서 구별하였다. 기원전 400년 경에 이르러서야 0이 들어갈 빈자리에 쐐기문자 둘을 넣어서 표시하게 되었다. 이때 쓰인 기호는 수가 아니라 숫자가 바르게 읽히도록 돕는 구두점에 지나지 않는다.
기원전 400년 경 고대 그리스에서도 수학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리스 수학자는 바빌로니아처럼 자릿수 체계를 쓰지 않았다. '정수론'을 포함한 '유클리드의 원론'에서 나타나 있듯이 그리스 수학은 기하학이 기본 바탕이다. 그리스 수학자들은 주어진 직선 자체를 수로 사용했기 때문에 숫자에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었다. 기록에 이름을 붙여야 하는 숫자는 수학자가 아닌 상인이 사용했기 때문에 그리스 수학에는 바빌로니아처럼 영리한 표기법이 나타나지 않았다.
천문학적 데이터를 기록한 수학자는 예외였다. 그리스 천문학자들이 사용한 기호 $\omicron$은 오늘날 우리가 쓰는 0과 같은 표기법이다. 일부 역사가는 '아무것도 없는'를 뜻하는 그리스 단어 "ouden"의 첫 글자인 $\omicron$(omicron)이라고 설명하지만 노이게바우어(Neugebauer)는 그리스인이 이미 오미크론을 70을 나타내는 숫자로 사용했으므로 잘못된 설명이라고 했다. 가치가 거의 없는 동전인 "obol"을 의미하며 카운터가 모래판에서 계산할 때 발생한다는 설명도 있다. 이 설명은 카운터가 비어 있는 열을 나타내기 위해 모래판에 $\omicron$처럼 보이는 부분을 남겼다는 것이다.(종이가 없던 시대인 고대 그리스인은 모래판에 도형이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서기 130년경,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마게스트'에서 빈자리 표시자 $\omicron$와 함께 바빌로니아 60진수 체계를 사용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숫자 사이와 숫자 끝에 기호를 사용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0으로 빈자리를 표기하는 것이 단단히 자리 잡았다고 보지만 그렇지 않다. 단지 소수의 뛰어난 천문학자들만이 이 표기법을 사용했지만 확실하게 자리 잡지 못했다.
0자리에 대한 개념(일종의 구두점으로 간주한 프톨레마이오스는 숫자로 생각하지 않음)은 인도 수학에서 그다음 등장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0을 포함한 아라비아 숫자와 숫자 체계가 탄생한 곳은 인도다. 인도 시스템이 이전 시스템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며 많은 수학 역사가들은 인도의 0 사용이 그리스 천문학자들의 사용에서 진화했다고 믿는다.
인도인은 "순야(sunya)" 또는 "공허(void)"의 개념을 발전시키면서 처음으로 0을 숫자로 인식했다고 한다. 확실한 것은 서기 650년경 인도 수학에 숫자로 0을 사용하는 것이 도입된 사실이다. 인도인은 자릿값 체계를 사용했고 빈자리를 나타내는 0을 사용했다. 사실 인도에서 200년 초부터 빈자리 표시 기호가 있다는 증거가 있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이것을 후기 위조로 보고 있다. 서기 500년경에 아리아바타(Aryabhata)는 아직은 0이 없는 자릿값 체계를 고안했다. 그는 수가 자리한 위치를 "kha"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0의 이름으로 사용된다.
위치 표기법에서 빈자리를 나타내기 위해 초기 인도에서 점을 사용한 기록이 있다. 같은 기록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x$처럼 미지수를 나타내기 위해 때때로 점을 사용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인도 수학자들은 위치 숫자에서 0에 대한 이름을 가졌지만 그것을 나타내는 기호는 없었다. 876년에 모든 사람이 진짜라고 동의한 인도인의 0 사용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있다. 876년으로 번역되는 날짜가 포함된 석판에 새긴 비문이다. 이 비문은 델리에서 남쪽으로 400km 떨어진 괄리오르(Gwalior) 마을에 관한 것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현지 사원에 하루에 50개의 화환을 바칠 수 있는 충분한 꽃을 생산할 187 x 270 하스타 정원을 심었습니다.
숫자 270과 50은 모두 오늘날 표시되는 아라비아 숫자와 거의 동일하게 표시되지만 0은 더 작고 약간 올라가 있다. 이것이 0이 정확하게 나타난 최초의 기록이다.
초기부터 숫자는 물건의 집합체를 나타내는 단어였다. 수의 개념은 점점 더 추상적이 되어 가면서 개체 집합의 속성으로 발생하지 않는 0과 음수를 고려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0과 음수를 숫자로 간주하려고 할 때 산술, 즉 사칙 연산과 조화를 이루는 계산 방식의 문제가 발생한다.
인도의 수학자 브라마굽타(Brahmagupta), 마하비라(Mahavira), 바스카라(Bhaskara)는 세 권의 중요한 책에서 이러한 질문에 답하려고 했다.
브라마굽타는 7세기에 0과 음수를 포함하는 산술 규칙을 제시하려고 시도했다.
주어진 숫자에서 자신을 빼면 0이 된다. 0과 음수의 합은 음수, 양수와 0의 합은 양수, 0과 0의 합은 0이다. 0에서 음수를 빼면 양수, 0에서 양수를 빼면 음수, 음수에서 0을 빼면 음수, 양수에서 0을 빼면 양수, 0에서 0을 빼면 0이 된다. 0을 곱하면 0이지만 나눗셈에 관해서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0으로 나눌 때 양수 또는 음수는 분모가 0인 분수이다. 0을 음수 또는 양수로 나눈 값은 0이거나 분자가 0이고 분모가 유한한 양인 분수로 표현된다. 0 나누기 0은 0이다.
실제로 브라마굽타는 $N$을 $0$으로 나눈 값인 $n/0$은 언급을 회피했다. 그가 0 나누기 0은 0이라고 주장할 때 확실히 틀렸다. 그러나 그것은 산술을 음수와 0으로 확장하려고 시도한 첫 번째 사람의 훌륭한 시도이다. 브라마굽타가 그의 걸작을 쓴 지 약 200년 후인 830년에 마하비라는 브라마굽타의 책을 업데이트하기 위해 고안된 Ganita Sara Samgraha를 썼다.
0을 곱한 숫자는 0이고 0을 빼도 숫자는 그대로 유지된다. 숫자는 0으로 나누어도 변하지 않는다.
바스카라는 브라마굽타 이후 500년이 지난 다음 사람이다.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0으로 나누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0으로 나눈 양은 분모가 0인 분수가 된다. 이 분수를 무한량이라고 한다. 약수가 0인 것으로 구성된 이 양에는 많은 것이 삽입되거나 추출될 수 있지만 변경은 없다. 세상이 창조되거나 파괴될 때 무수한 존재들이 흡수되거나 전개되더라도 무한하고 불변하는 신에게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다.
바스카라는 $\large\frac {N}{0}\normalsize = \infty$라고 써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우리는 첫눈에 바스카라가 옳다고 믿고 싶지만, 따져보면 옳지 않다. 이것이 참이라면 $0 × \infty=N$이므로 결국 모든 숫자가 서로 같아야 한다는 모순이 생긴다. 인도의 수학자들은 0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바스카라는 다음과 같이 0의 다른 속성을 올바르게 설명했다.
0의 거듭제곱은 0이고 거듭제곱근도 0이다. $0^{2} = 0, \sqrt 0=0$
인도 수학자들의 뛰어난 업적은 더 서쪽에 있는 이슬람 및 아랍 수학자에게 전해졌다. 알콰리즈미는 인도 자릿수 체계와 숫자 1, 2, 3, 4, 5, 6, 7, 8, 9, 0을 사용하는 힌두 계산법을 다룬 책을 썼는데 그것이 현재 이라크 지방에서 위치 기본 표기법에서 0을 빈자리 표시자로 사용한 최초의 책이다.
12세기에 이븐 에즈라는 인도의 기호와 십진 소수 표기법에 대한 아이디어를 유럽의 일부 학식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도움이 된 숫자에 관한 세 개의 논문을 썼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자릿값이 있는 정수의 십진법을 설명하면서 galgal ( 바퀴 또는 원을 의미 )이라고 부르는 0을 사용한다.
조금 지난 다음 알-사마왈(al-Samawal)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0에서 양수를 빼면 같은 음수가 남는다. 0에서 음수를 빼면 동일한 양수가 남는다.
인도 사상은 동쪽으로 중국으로, 서쪽으로 이슬람 국가로 퍼졌다. 1247년 중국의 수학자 진구소( 秦九韶: Qin Jiushao )는 9개의 섹션으로 구성된 수학 논문을 썼다. 0을 나타내는 기호 O와 음수를 사용하고 3차, 4차 방정식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중국인의 나머지 정리도 나온다.
조금 후인 1303년에 주세걸(朱世杰: Zhu Shijie)는 0을 나타내는 기호 O를 다시 사용하는 '네 가지 미지의 옥으로 만든 거울'을 저술했습니다. 찾아보니 이 책에 파스칼의 삼각형이 그려져 있다.
피보나치는 수 체계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유럽에 가져온 주요 인물 중 한 명이다. 이탈리아 수학자 피보나치 힌두-아라비아 숫자 체계와 유럽 수학 사이의 중요한 연결 고리다. 1200년경에 피보나치는 '주판의 책(Liber Abaci)'에서 유럽인을 위해 0과 함께 9개의 인도 아라비아 숫자를 소개했지만 그 이후 오랫동안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피보나치는 다른 숫자 $1 , 2 , 3 , 4 , 5 , 6 , 7 , 8 , 9$와 같은 방식으로 $0$을 취급할 만큼 대담하지 않았다. 분명히 인도 숫자를 유럽으로 가져오는 중요한 일을 했지만 0을 다루는 방식에서 인도 브라마굽타 , 마하비라 , 바스카라의 정교함이나 알-사마왈과 같은 아랍 및 이슬람 수학자들의 정교함에 도달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숫자 체계, 특히 0의 발전이 이때부터 꾸준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니었다. 카르다노는 0을 사용하지 않고 삼차 및 사차 방정식을 풀었다. 0이 있었더라면 1500년대에 그의 작업이 훨씬 더 쉬웠을 것이다. 1600년대에 0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많은 저항에 부딪힌 후에야 가능했다.